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흰 바탕에 아래 반이 검고, 붉은 원으로 장식을 해 단 연은, 우아한 곡선의 궤적을 그렸다 청량한 가을 공기를 타고 끝도 없이 하늘 위로 높이 솟아 올랐다. 연이 떠 있는 곳 아래에는 가을 하늘 만큼이나 맑고,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. 통영과 섬을 잇는 배가 오가는 포구의 방파재 위, 도포를 차려입고 하늘과 땅 중간에 서 있는  양반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바로 연의 주인이었다. 허나 그는, 그저 주인일 뿐 연을 띄워내고 조종하고 있는 자는 아니었다. 양반 옆엔 더이상 그에게는 불가능한 잰 솜씨로 연을 띄우라 시키기 위해서 대동하고 나온 시동이 있었다. 연을 마치 제 수족처럼 다루고 있는 소년은 초라한 장인 도제의 옷차림이었다. 바닷 바람에 몇 천번 좋이 씻겨져 닮아버린 듯한 표정은 이 근방에서 몇십년을 살아낸 뱃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 그것과 닮아, 열 서너살 정도 되어보이는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으리만치 초연했다.

"야, 이눔아. 니 연 참 잘 날리는 구마."
"나리를 위해서 연을 날리라고 웃 돈 까지 받았는데 어찌 잘 날리지 않을 수 있소?"
"허허, 뭐 나는 평생에 손 놀리는 일에 재주가 있어본 일이 없는기라, 연 장인 아들내미 솜씨를 좀 빌리면 어떻겠노? 근데, 니 서울말 쓰나?"
"그렇소. 그래도 내가 공방에서 배운지 삼 년인데, 연 날리기 써비스까지 해줘야 되는 손님은 귀하가 처음이외다."
"써비스? 써비스가 뭐꼬?"
"양인들 말로 노력 봉사, 뭐 그런 뜻이오."
"니 우째 그런것도 아나? 참 신기한 아다, 니도."
"신기할 거 없소."
"마, 무뚝뚝하기는. 야야, 저기 보그래이. 니 저 분이 누구신지 아나?"
"......."

양반이 가리킨 손가락 너머에는 방금 아이 셋을 거느리고 막 배에서 내린, 역시 흰 옷을 입은 선비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. 연신 떠드는 아이들의 말에 웃으면서 이쪽으로 그 흰 옷의 남자에게 양반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.

"아이고, 나으리. 으찌 나오셨습니까?"
"오래간마이네요. 아들이 간만에 뭍에 좀 와보고 싶다케서 잠깐 몰래 빠져나왔십니다. 정식으로 건너온 게 아이니까, 딴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좀 해주이소."
"마, 여부 있겠십니까. 잘 살펴 가이소."
연신 허리를 굽히면서 흰 옷의 남자를 보낸 양반은 멀어져 가는 남자와 아이들을 한 참 바라보다가 옆을 지키고 서 있는 소년에게 고개를 돌렸다.

"니는 어른 보고 인사도 안 하나?"
"내 저 분 누군지 모르오."
"니 진짜 통영 놈 맞나? 우찌 통제사 어르신을 모르노?"
"정치에 관심없는 아이 놈이 뭘 알겠소?"
"아야, 이제 골치가 아플라 그란다. 니는 말투가 왜 그 모양인데?"
"예의를 못 배웠는데 어쩌겠소?"
"잘-났다, 계속 씨부리라."
"......"

"즈 아아들도 니 또래구마, 그래. 아니, 니가 좀 어린거 같기도 하다. 저 서울말 쓰는 아아는 안동서 집안이 망하는 바람에 여까지 왔다카는데, 원래 통제사님이 직함이 아직 읎으실때 춘부장이 학문을 좀 배우신 인연이 있다카드라고. 글고 저 머리 허연 아는 바다 섬에서 통제사님이 다니시다가, 줏어오싰대. 다들 귀것이라카고 키우신대는 걸 말맀는데, 뭐가 좋은지 그르케 이뻐하신다드라고. 그리고 저 이쁘장하고 눈 치켜올라간 아아는..."

"알고 있소. 통영 제일 갑부집 외동 아들인데 모르겠소. 저 집 어르신이 우리 공방에 전에 연을 주문하시느라 오셨을 때 만났소."

"그르나? 암튼 돈 되는 일은 니도 잘 아는기구마. 그래, 저 아아가 그리 집안에서 금이야 옥이야 하는 아가 아이가. 근데 통제사 으르신을 딱 한 번 뵙드니 인품에 반해슨지 졸-졸 쫒아 댕기느라 집에도 안 갈라캐. 그래서 아에 집안에서 으르신에게 사정사정해서 즈리 돌봐주신다 안카나."

"그것도 알고 있소이다."

"암튼 그라서 아아들이 저리 맨날 셋이 붙어다닌다 카드라고. 어떠나? 나중에 지나가실때 즈 행님들하고 니  말이라도 좀 터 볼래?"

"됐소. 안 그러겠소."

"와? 뭐가 불만이고?"

"반상의 구분이 있는데 내가 어찌 끼겠소?"

"니는 아아는 똑똑한 긴데 와 말하는 게 그따구고? 치아라. 이제 내는 그만 들어갈란다. 대금은 반쇠 니한테 줄끼니까, 잘 전해드리라?"

"그러시오."

무뚝뚝한 소년의 표정은 대화 내내 미동도 없었다. 도포를 펄럭이며 먼제 돌아서 집으로 간 양반과 헤어져서 한참 걸어, 골목이 좁아지는 곳까지 가 닿아서도 전혀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. 연뿐만 아니라 통영의 온갖 장인들이 모여있는 십이공방이 이 주변에 흩어져서 하나의 구역일 이루고 있었다. 총명할 뿐만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장인들의 친인척 관계의 중심점에 서 있기도 한 소년은 십이공방의 모든 기술을 거의 다 배워가고 있었다. 나전칠기, 갓 짜기, 발 엵기, 연 만들기, 장석 깍기. 소년이 익힌 것은 단순히 공방기술 뿐만이 아니었다. 그보다 더 위험한 기술, 즉 대나무 한 줄기로 사람의 몸에 박힐 가장 날카로운 침을 만들어내고, 약을 다루어 목숨을 위급하게 하는 기술까지가, 소년이 배워 익힌 것이었다.

집안 한 구석, 제 방에 들어온 소년은 오죽을 꺼내들고 작업을 시작했다. 방금 스쳐지나친 소년의 아버지가 아들의 스승을 위해서 주문한 발을 엮기 위해서이다. 온갖 전술에 능하고 기품있는 그 젊은 통제사는 통영 전체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, 어두운 구석에서 전해지는 정보를 접할 수 있는 소년은 통제사가 너무 앞서나가는 사상을 갖고 있기에 적도 많은 입장이란 걸 익히 알고 있었다. 그뿐이랴. 점점 나라 전체에 외부에서의 어둠이 퍼져나가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군부 한 곳의 책임자란 것이 얼마나 위태한 자리겠는가. 소년은 묵묵히 대나무를 잘게 쪼개어 나갔다. 연하게 휘어지는 검은 대나뭇 발은 마치 아까 본, 자신보다 한 두 살 더 연상인 소년의 윤나는 머리칼을 연상시켰다.

 
삼 년후, 결국 통제사는 정쟁에 휘말려 참수되었고, 통제사의 제자들도 통영을 떠났다.듣기로는 전주 근처에서 일어난 운동인지 의병인지에 참예하였다 했다. 그 즈음 기술을 완성하고 거의 어른으로 장성한 반쇠는, 연장 일습을 챙겨들고 길을 떠났다.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그의 매운 손 끝을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에든 무수히 많을 터였다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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유안양의 리퀘스트로 외가의 근거지을 농락해 보았습니다. 역사적으로 이 시기와 배경을 바탕으로 한 은혼 어레인지는 과연 시도해도 될 소재인지 미묘하다고 생각합니다. 임진왜란과 일제시대, 통영의 흥망과 일본의 정세는 사실 떼놓을 수 없는 애증관계라서요. 혹시 신경이 쓰이신다면 넓은 마음으로 양해를 바랍니다.

12공방의 배후에 사실 숨겨진 공방인 제13공방이 있고 그 곳에서 온갖 기술을 겸비한 암살자를 키운다는 설정은...솔직히 마음에 꽤 들긴 하는데 이걸로 뭔가 진짜 썼다간 한 대 맞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지도 갸악.

by viai 2011/11/05 02:51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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